한국 작가로서는 드물게 국내에서보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등 유럽에서 초대전을 연속적으로 가지는 화가가 있다. 그는 이탈리아 예술계로부터 거장이라는 뜻의 ‘마에스트로(Maestro)’라는 칭호를 받았다. ‘임무상 한국화’가 유럽에서의 반향을 보면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이 유럽에 진출한 배경에는 임무상 작가만의 회화 세계와 작가 정신이 담겨 있다.
그의 작품 재료 대부분이 석채다. 그는 벼루를 만들 때 생기는 돌가루를 직접 구입해서 가루를 만든다. 곱게 갈린 돌가루를 사용하면 그림이 너무 곱게 나오고, 조금만 투박한 돌가루를 사용하면 화지를 거칠게 하여 붓질이 쉽지 않다. 벼루 가루에 안료를 섞을 때는 미디엄이라는 재료를 사용한다. 그러면 색을 섞는 것이 좀 더 쉽고 색을 바를 때도 붓이 부드럽게 움직여서 그림을 그리기가 한결 수월하다. 그는 돌가루를 오랫동안 연구하며, 자연에서 나오는 천연의 재료로 한국적인 빛깔과 질감을 표현하는 그만의 석채를 완성했다.
그는 단 하나의 색을 찾기 위해 공들이는 시간이 많았다. 작업할 때마다 필요한 부분에 채색할 만큼의 양만 만든다. 단 하나의 색은 ‘이 색이다, 이 정도면 됐다’라는 느낌이 들 때의 빛깔이다. 다음 작업에서 같은 농도로 색을 만들어도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그는 이를 ‘마음의 색’이라 한다. 그렇게 한 작품의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색이 되어 수천여 점의 그림들이 세상에 태어났다.
문경 산북면 우곡리 읍실,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은 산들로 둘러싸인 깊은 산속의 오지다. 어릴 적 일곱 살부터 화가의 꿈을 가졌다. 하지만 너무 빈한하여 중학교만 졸업하고 진학의 꿈을 접고 어머니 일을 돕다가, 홀로 1950년대 후반에 서울에 올라왔다. 아이스께끼 장사, 식당 서빙, 가지밭과 오이밭에서 일하며 서라벌예술고등학교에 가고자 돈을 모아서, 드디어 학교에 입학했다. 장사하면서도 책을 놓지 않고 매일 그림을 그리고 일기를 쓰며 꿈을 이뤄갔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책가방 한쪽에는 양담배, 은단, 손톱깎이, 볼펜 등 생계를 담고, 다른 한쪽에는 책을 넣었다. 그는 주경야독하며 졸업했다. 어머니가 급작스럽게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와 세 남매 동생의 서울살이가 함께 시작되었다. 앞가림하기도 바쁜 21살에 가장이 된 것이다.
아내를 만나고 결혼을 선택하면서, 대학에 대한 꿈도 접었다. 하지만 그에게 그림은 공기와 같았다. 어느 날 아내는 “많은 글과 그림을 이렇게 오랫동안 계속한다는 건 애정이 있다는 뜻이고 평범한 게 아니다.”라며 다시 그림을 그려볼 것을 제안했다. 아이들과 함께 살림살이가 넉넉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뻔뻔하게 그림쟁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40살이었다.
그림을 시작하고자 했을 때, 소개로 김홍종 은사를 만났다. 그는 미인도에서 유명하며, 4년 동안 김홍종 은사를 통해 개인지도로 대학교 과정을 배웠다. “먹을 쓰되 금처럼 써라”라는 첫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그 말씀을 새기며 그림 공부에 관한 간절함으로 채운 시간이었다. 4년 배움의 과정은 기회가 닿지 않아 대학을 못 갔던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작가로서 인생의 첫 번째 기회를 만났다. 그는 1984년쯤 목우회 공모전에 출품했다. 순전히 친구의 의지로 출품하였으나 입상했다. ‘그만의 스타일’ 그림으로 작품의 대중성과 역량을 처음 검증받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작품에 대한 검증을 더 받아보고 싶었다. 바로 다른 공모전에 출품했다. 중앙미술대전 출품 당시 작품을 두 점을 내야 했는데, 한 점은 당선이 되고 한 점을 돌려받았다. 그는 돌려받은 작품을 다시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출품하여 입상했다. 같은 해, 두 공모전에서 모두 입상하는 좋은 결과를 얻었다. 관동대 교수 친구가 “내 교수 자리를 자네가 하라. 나는 ‘입선’만 두 번 하고 이 역할을 하고 있는데, 자네가 나보다 낫구먼”이라고 했었다.
그는 이렇게 외적으로는 화가의 길이 트였지만, ‘그만의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발전된 작업에 대한 갈증은 커져만 갔다. ‘지금보다 더 나은 작품들을 만나려면 더 깊은 공부만이 답이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작가로서 모든 행보는 아내의 절대적인 지지가 있었다. 아내는 고민하지 않고 공부를 더 해보라고 격려했다. 여러 방면을 통해 모색 중에 동국대 대학원의 연구 과정을 선택했다. 현대미술의 이론 공부, 슬라이드 교육, 현대미술의 흐름 등 현재 그의 작품세계를 만들기 시작한 중요한 것들을 많이 익히고 알게 되었다.
배움의 끝없는 도전과 작품에 대한 지독한 고민 과정을 거치며, 드디어 1991년 롯데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개인전 주제가 ‘고향 무정’이다. ‘고향 무정’은 그가 살았던 문경의 산천초목과 마을 풍경들을 재해석한 전시였다. 첫 개인전은 “고향을 품은 감성적인 전시”라며 호평를 받았고, KBS에서도 나와서 취재할 만큼 주목을 받기도 했다. 몇 년 뒤 서울갤러리에서 ‘향토 시심’의 주제로 두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두 번의 전시는 모두 ‘고향’을 담은 그림들이다.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고향에 대한 작품에 집중하여 ‘린(隣 Rhin 이웃)’이라는 주제가 탄생했다. ‘자연은 곡선이다’라는 것을 어떻게 작품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길었다. 고향을 수놓았던 초가지붕의 곡선, 초가의 이음과 풍상에 찌든 그런 곡선, 지붕과 지붕으로 이어지는 곡선을 재해석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하늘 지붕만 살짝이 뚫린 고향 마을, 읍실의 초가 마을에서 곡선미와 공동체 문화를 찾을 수 있었다. 고향을 닮고, 고향을 담은 작품들은 그렇게 조금씩 세상 밖으로 나왔다.
첫 해외 전이 유럽에서 열렸다. 파리의 ‘그랑 팔레(Grand Palais) 전시회’ 측에서 한국적인 작품을 원하고 있었다. 이렇게 우연한 기회로 2012년 ‘그랑 팔레’에 그가 한국 화가로 추천되었다. 당시 ‘그랑 팔레’에 대작 하나와 소품 하나, 두 점을 출품해야 했다. 출품할 그림들을 선별하면서 마음에 꼭 드는 작품이 두 점이 있었다. 아내는 큰 그림 한 점을 더 챙겨주었다. 그렇게 한 점을 더 챙겨 간 것이 타 갤러리 전시회로 연결됐다.
임무상 화가의 작품을 좋아하던 데레사 씨는 재불 한국인이다. 그녀는 직접 그랑팔레 전시회 방문과 다른 갤러리를 소개하며, 한국과 유럽 문화 교류 매니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 순회전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의 그림은 이탈리아 전시도 끝나자마자 또 다른 갤러리 개관 전에 초대되어서 이탈리아 작가들하고 4달 동안 전시했다. 그들은 생소한 나라에서 온 동양인의 작품만을 보고, 그 작품에 매료되어 길을 열어주었다. 지금도 50여 점이 외국에 전시되어 있다. 이는 그의 예술에 대한 집념과 열정의 결과물이다.
학연과 지연이 없는 가난한 화가였던 그는 “화가란 그림만을 통해 공감을 얻고, 그것으로 행복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임무상 화가는 현실에 만족하며 자신에게 충실하자는 신조로 계속 살아가고자 한다. 빈센트 반 고흐와 이중섭을 멘토로 삼고 정진하며 부끄럽지 않은 예술가로 남고 싶다고 했다.
여러 해외 전시전을 통해 그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음을 인정받았다. 작품 소재로는 고향마을의 초가집, 금강산과 백두산, 소나무와 산, 달 등 지극히 한국적이다. 그만의 빛깔과 질감으로 표현되는 자연 친화적 광물성 석채 안료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그림은 그저 나의 손을 빌릴 뿐 마음의 영혼을 표출하는 것이다”라는 그의 정신 자세로 오직 한 길을 걸어왔다.
임무상의 한국화에서 마지막 목표로 하는 초월성은 창조된 자연을 추상과 반추상 작품으로 표현된다. 이 초자연적인 작품이 초현실적인 작품이 되고 초월적인 예술로 승화된다. 그가 추구하는 초월성으로 자연의 본질을 표현하는 현대 한국 화가로서 독보적인 글로벌 아티스트가 되길 기대한다. 또한 소나무를 심는 솔바람회원들과의 자연 사랑 정신이 계속되길 응원해 본다.
한국강사신문 유여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