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철(미술평론가)

곡선을 통해 본 우리 문화의 정형 읽기

 [故鄕有情]에서 [鄕土詩心]으로 이어지는 작가 임무상(林茂相)의 작품 세계는 그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태어나고 자라난 향리에 대한 강한 애정과 짙은 향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근본과 뿌리를 유독 중시하는 우리 민족 특유의 감성에 비추어 본다면 작가의 작업 의도는 어렵지 않게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 유독 작가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정서는 아닐 것이다. 이는 우리 민족 고유의 독특한 감정 체계에서 기인하는 바도 있겠지만 특히 근대화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 급속한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 보편화된 감상적 정서라 할 것이다.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의 변이는 삶의 양태 뿐만 아니라 삶을 영위하는 인간 자체의 심리적인 부분까지 철저하게 변화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과도기적 상황에서 야기될 수 있는 정신적 부조화의 반영이라 할 것이다. 즉 자연주의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는 목가적 서정이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을 근본으로 하는 새로운 산업 사회 구조에서 겪게 되는 충돌이자 모순인 것이다.

 강하고 억센 먹빛과 향토색이 어우러지는 작가의 [ 고향유정 ]은 이미 인적이 끊어진지 오래이다. 모양은 있되 그곳에서 살아 숨쉬는 삶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러한 형상들은 처연함 마저 느끼게 하는 것이다. 낡고 무너져 가는 담배 건조장의 투박한 흙벽과 무심하게 키를 키워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지만 이미 그늘의 주인을 잃은 정자나무는 바로 작가가 못내 아쉬워 품에 안아보는 고향의 모습들이다. 마치 깊게 패인 주름살을 연상케 하는 거친 흙담들과 서로 키를 재며 옹기종기 자리한 초가의 모습들은 어쩌면 돌아가고 싶어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 작가의 마음속에나 자리하는 상상의 고향, 피안의 정경일지도 모른다.

완만하고 부드러운 곡선들로 이루어지는 초가의 풍경들은 바로 이러한 고향을 상징하는 작가만의 독톡한 상징체계이다. 이러한 초가들은 단순한 서정적 풍경이 아니라 일종의 복합적인 의미와 내용들을 지니고 있는 일종의 심상적 부호라 할 것이다. 즉 전원과 더불어 삶을 영위하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자연주의적 서정에서 산업화, 도시화에 따라 급작스럽게 피폐화 된 농촌의 부정할 수 없는 현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절대적인 정신적 귀향처로 자리하고 있는 고향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운 그리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작가의 고향에 대한 인식이 감상적인 향수 정도에 그친다면 이는 소재주의적 전형의 하나로 그 내용이 제한될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감상적인 회한과 감정을 바탕으로 또 다른 가치 체계화를 상징하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고향유정],[향토시심]을 이어 나타나게 되는 [隣-曲線共同體]라는 이번 전시의 주제인 것이다. 작가는 우선 곡선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에 주목하고 있다. 도자기, 한복, 버선, 장구, 농악 등과 심지어 무덤에 이르기까지 우리 미술의 전형을 거론함에 있어서 곧잘 인용되는 갖가지 사물들과 현상들이 지니고 있는 우아한 곡선의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이들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심미적, 상징적 내용들을 강조하고 있다. “어눌하고 투박해 보이지만 여유있고 넉넉해 보이는 선, 우직하면서도 천박함이 없고 소박하고 단아하며 해학이 있고 따뜻한 이웃의 훈훈함이 있는 우리 고유의 맛과 멋이 넘치는 선”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의 화면에 등장하는 초가는 바로 이러한 곡선의 심미를 상징하는 은유적인 부호인 것이다.

 일련의 전시 주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가의 고향은 형상에서 정신으로, 현실에서 이상으로라는 일정한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 온 것이다. 화면의 구성 역시 초기의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에서 점차 상징적이며 개괄적인 표현으로 전이되고 있다 할 것이다. 설명적인 군더더기는 점차 약화되고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만으로 이루어진 화면의 구성은 보다 분명하고 명쾌한 것이다. 어깨를 맞대고 있는 초가들 역시 해체되고 재조합되는 과정을 통하여 커다란 원운동의 궤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마치 둔중한 기운이 꿈틀거리는 듯한 원운동의 이면에는 바로 예의 곡선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곡선이 지니고 있는 심미적 특성을 통하여 우리 고유의 것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의 전형을 모색하는 것이며, 이를 통하여 도시화 된 오늘의 사회에 대하여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이 지니고 있는 소중함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린(隣)은 원융(圓融)한 것이어서 하나가 모두요, 모두가 하나 됨을 뜻한다. 우리다운 곡선미와 어우러진 공동체 의식을 재해석하여 한국미에 대한 새로운 심미감을 창출해 보고자 함이다”라는 작가의 변은 바로 이러한 사고와 사색의 반영에 다름 아닌 것이다. 급작스런 격변의 세월 속에서 마치 고향이 그러하였듯이 좋고 나쁨의 올바른 구분도 없이 일방적으로 사라져 버리게 된 우리 아름다움의 전형과 또 그것을 통하여 조화롭게 어울리는 공동체적 삶이라는 덕목까지를 유추해 내는 작가의 작업은 분명 목가적인 서정주의나 감상적인 향토주의의 그것에서 일정 부분 벗어나고 있다 할 것이다. 이른바 작가의 [ 隣-曲線共同體 ]는 일방적으로 산업화, 서구화되어 가고 있는 오늘의 우리 사회에 대한 반성과 염려를 담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고향은 단순히 동심과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돌아가야 할 근본과도 같은 것이다. 작가의 염려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근본적인 것, 바탕이 되는 원초적인 것으로부터의 이탈과 방향상실이라 할 것이다. 즉 어쩔 수 없이 적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의 삶과, 이러한 삶속에서 필연적으로 느끼게 되는 한없는 상실감, 허전함 등과 같은 아픔과 병리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대 미술로서 서구 조형이 독주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작가가 굳이 곡선이라는 조형 요소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심미 원형을 추구하거나, 개인주의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공동체 의식을 새삼 제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에 기인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그림을 통하여 우리 문화에 대한 소중함과 이웃 사랑을 함께 나누며 우리다운 맛과 빛깔이 어우러져 내가 추구하는 한국성이즘이 빚어 나올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라는 작가의 말은 이러한 내용에 대한 확인에 다름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