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숙(미술평론가)

임무상과 우리다운 곡선미의 찬가

임무상(林茂相)의 그림을 보노라면 여러가지 생각들이 떠오르게 된다. 일찍이 독일의 불교미술사가인 제켈박사가 한국미술의 특징을 가리켜 미완성의 완성, 비계획의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우리의 지하 출토품에서 발견되는 공예품, 그리고 초가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특징으로 마치 서구의 프리미티비즘에서 그랬듯이 합리적이고 획일적인 사고에 젖어있는 현대인에게 충격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임무상은 스스로 이점을 곡선미학(曲線美學)과 공동체의식(共同體意識)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20여년 동안의 연구를 통해 자신의 회화에 이를 반영했다고 말한다. 뒤에서 보지만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곡선의 조형표현은 화선지와 먹이라는 전통적인 재료와 기법을 통해 실현하고 있다. 이를테면 먹과 종이는 제켈이 지적했듯이 비계획의 계획, 무목적의 목적이랄 수 있는 미묘한 조형감각을 표현해 낼 수가 있으며, 바로 이 미묘한 조형 논리속에 공동체의식이 내포되어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직선(直線)은 목적을 나타내지만 두리뭉실한 곡선은 목적이면서도 목적이 아닌 것을 나타내주기 때문이다. 분명히 동양인의 선(禪)사상에서는 곡선이나 원은 양보이고 자기해방(해탈)으로 이해된다.

임무상의 그림에서 떠오르는 또 하나는 프랑크 로이드•라이트라는 현대건축가의 말이다. 그는 건축은 절대로 자연의 의지를 거슬러서는 안된다고 말했으며 그랬기 때문에 그의 건축은 당대의 많은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즐겼던 수직선을 포기하고 시종일관 수평선을 그의 건축에 적용하였다. 그의 건축들이 자연환경을 거슬리지 않고 동화되었던 것은 우뚝솟은 수직적이 조형이 아니라 납짝형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납짝형건축이 다름아닌 우리의 전통건축이며 우리민족이 수천년 살아오면서 즐겼던 주거환경이며 조형의지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일인 학자인 야나기(柳宗悅)는 한국의 초가집 모양에서 조선조시대의 백자(白磁)에서처럼 후덕한 모성애와 평화를 느낀다고 했던 것이다.

임무상의 그림에서 거북이등처럼 두리뭉실하게 휘어진 초가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그 초가들은 언제나 외톨이가 아니라 복수이며 그 모양도 옹기종기 다소곳이 모여 있거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포옹할때처럼 겹쳐지는 모습으로 한 덩어리를 이룬다. 화가는 이 조형의지를 공동체의식이라고 말한다.

‘두리뭉살한선, 너그롭고 자유분망한선, 걸림이 없는 선, 여유로움이 넘치는 선, 포근하고 정감어린 선,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속구치는 선을 본다. 추박하면서도 교만함이 없고 우직하면서도 천박함이 없고 질박하면서도 간사함이 없고 꾸밈이 없는 소박하고 단아한 우리 고유의 맛과 멋이 넘치고 해학이 있고 따뜻한 이웃이 있고 훈훈함이 있다. 초가는 자연과 조화가 잘 어우러진, 즉 인간과 자연을 조화시키려했던 우리의 민족성과 전통을 그대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화가의 초가에 대한 이 찬가는 이미 야나기가 언급한 그것보다도 훨씬 깊고 폭넓은 언어로 구사되어있어, 그가 얼마나 이문제를 정력적으러 탐구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임무상의 그림을 보면서 떠오르는 또한가지 생각은 ’바우하우스’의 조형사상이다. 미로, 클레, 칸딘스키 등 우리에게 너무도 유명한 이들 거장들은 그림의 대상에서 자연의 의지를 거슬르지 않는 그러니까 기분좋은, 그러면서도 가장 간편하고 단순한 조형요소를 걸러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조형사고(造形思考)에는 세계를 단순한 도형(圖形)으로 바라보는 기하학자의 시각이었던 것이 고아메바를 관찰하는 미생물학자의 눈이기도 했던 것이다. 옛날 중국의 자연시민들은 세계(자연)를 온통 암수컷의 사랑놀이(詩經)로 보기도 했다. 이런 시각이 얼마나 깨끗하고 투명하며 천진 난만한가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바우하우스의 조형사고가 현대미술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에 쉽사리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화가 임무상이 조형에 눈을 뜨고, 오직 조형미를 통해 우리다운 미감을 표현하려는 그 심상찮은 의지를 이런 맥락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물론 곡선문화는 우리만의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천체(天體)와 지구도 곡선이고 원운동을 한다. 우리는 잠시도 곡선과 원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천체나 지구가 직선으로 움직인다면 모든 것은 부딛치고 폭발하여 결국 생명이란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근대기를 살았던 서구 사람들은 수직선이든 수평선이든 직선을 애호하였으며 그런 결과가 현대문명이란 괴물이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따라서 화가 임무상은 곡선과 공동체의식을 주제로하여 이만한 작품을 만들어낸 투철한 작가의식은 응당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또 한가지 생각나는 것은 그의 그림에 수묵정신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동양에서 수묵(水墨)을 단순한 색채이거나 물질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은 인상주의나 야수파화가들이 빛이나 색채에 대해 생각했던것보다도 더 한층 집요하고 끈질긴 본질에 대한 물음이었던 것이었기 때문에 묵객(墨客)들은 오직 먹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것을 하나의 긍지로 생각했다.

철학자는 돌이라는 말이 있듯이 먹도 실은 문인화가들에게는 사유의 시발점이자 그 모두이며 그들이 먹에 정신이 들어있다고 믿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것이다. 화가 임무상의 그림이 기본적으로 먹을 기초로하고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 먹은 그의 작품에서 관중을 압도하는 힘(氣)과 무게를 가지며 선과 선, 형태와 형태의 경계를 허물거나 애매 모호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화가가 스스로 공동체의식이라고 표현했던 그 이념이 다름아닌 먹의 번지기에 의해 설득력있게 표현된다는 사실은 눈여겨 볼만하다.

그의 그림을 이렇게 분석적으로만 이해하면 마치 그의 작품이 시계의 뒤쪽 뚜껑을 열었을때처럼 복잡하고 살벌한것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보다싶이 실제의 그의 작품은 전혀 반대로 단순하고 정감적인 무-드로 가득찬 그림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